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유명 베스트셀러다.
소설이 유명하니 관객은 그 대중성으로 영화 <향수>에 매료된다.
18세기 프랑스, 생선시장 바닥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비운의 운명을 타고 난 아이, 그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냄새, 향기를 기억하는 천재성을 가졌다.
그는 세상 최고의 향기를 가진 향수를 만들어내는 게 유일한 꿈이다.
장 그르누이는 독특하고 특별한 향을 얻기 위해서 살인도 서슴치않고 자행한다.
이게 영화 <향수>의 컨셉이자 스토리다.
영화는 단순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데서 출발한다.
자신에게선 전혀 냄새가 향기가 나지 않는 주인공 남자 그르누이,
그렇지만 모든 냄새와 향을 기억하는 기이함을 소유했다.
인간의 체취를 뽑아서 세계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 한 남자의 이야기.
감독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원작자 쥐스킨트의 소설적 방대함을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소설의 상상력의 세계가 현시적인 영상 화면에서 축소되고 단순화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의 뛰어난 점도 있다.
영화는 원작의 곁가지를 잘라내며 주인공 남자의 욕망을 충실히 재현했다.
각색 작업이 충실히 진행됐다고 본다.
영화는 상상력의 세계를 무한정으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한 남자의 욕망의 세계를 재현했다고 본다.
환상적 소설이 현실적 이야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다.
소설을 읽은 독자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상상한 세계를
현실로 확인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소설이 갖고 있는 상상의 세계는 영화보다 더 풍부하다.
영화 <향수>는 그런 현실을 재현했다.
일본 영화 한편이 있다. <훌라 걸스>, 인간이 현실적 환경 변화를 받아들이는 생존 방식과
적응에 관한 고민거리를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다.
1965년 도호쿠의 한 탄광을 배경으로 모리셔스 섬에서 벌어지는 도도새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도도는 포르투갈 언어로 ‘바보’라는 뜻이다.
한때는 일본 천황이 직접 석탄 캐는 것을 보기 위해서 방문한 적도 있는 섬.
그래서 국가 기간산업의 중추적 역할로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던 탄광촌.
그러나 석유를 사용하게 되면서 탄광촌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대규모 노동자 감원이 불어 닥친다.
우리가 겪어 본 구조 조정, 명퇴, 감원, 살기 위해서 붙들어야 하는 생존의 현실이 보여진다.
3대에 걸쳐 석탄만 캐던 마을 사람들은 세계의 변화에 맞서 온몸으로 거부하는 몸짓을 보여준다.
한편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하와이언 센터로 만들어 훌라 춤을 배우고
직업 댄서가 된다. 그런 과정에서 봉건적 문화에 갇힌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직 석탄 캐는 것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탄광 막장 속으로 들어가
묵묵히 채굴 작업을 한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 결국 인간들은 현실 변화에 동화되고
조절 당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떠밀려가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현실에 동화되고 있는가.
동화 되어야 할 시점인가. 조절 당하고 있는가. 조절해야 할 시점인가.
영화 <훌라 걸스>는 현실극복의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를 하며 나아가는 사람들.
변화의 물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그러나 결국 조금씩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건 슬픈 일인가 기쁜 일인가. 슬프면서도 기쁜 일인가,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한 김영랑 시인이 떠오른다.
<훌라 걸스>는 슬프면서도 화려한 희망을 일구어가는 한 일본 여자의 이야기였다.
프랑스나 일본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영화 현실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영화는 1년에 1000편 이상이 생산된다.
미국 할리우드는 년 간 2천 5백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전 세계로 배급된다.
한국영화는 상업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 이렇게 세 분야로 갈라져 나누어져 있다.
한반도 분단 현실과 유사하다. 보통 대부분 국내 소비가 주된 시장이다.
상업영화가 50편 내외, 나머지 900편 내외가 독립 단편 장편영화, 예술 영화인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주로 독립영화, 예술영화 쪽에 신경을 많이 쓴다.
대기업 자본으로부터 분리된 독립, 예술영화를 진흥 육성하기 위한 정책적 실천이라고 봐야한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한 해 운영비로 수 백 억 원 정도를 소비한다.
그 중에 영화아카데미가 연간 100억 원 가까이 소비한다.
실제로 영화감독, 영화시나리오, 영화촬영, 영화조명 등 현존하는 현직 감독협회 등에는
지원 자체가 없다. 불공정하다.
한국영화는 미래를 위한 투자 육성으로 영화아카데미와 독립, 예술 영화 쪽에 지원한다지만
실제로 영화업을 하는 현실의 영화인들을 위한 정책 실천은 부족하다.
대기업 상업영화는 스스로 내부 거래로 투자 기획, 제작, 유통, 정산 방식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해법을 찾고 있다,
이 또한 해외 메이저 업체들의 공격적 물량 공세에 맞서 인터넷영상 서비스(OTT) 시스템과 연대하는
현실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스스로 더 큰 이윤을 위하여 자구책을 마련한다.
CJ ENM이 미국 현지 제작, 배급사를 1조원 이상 주고 매입하며, 할리우드 브랜드 가치와
미국 영화 제작 배급 시스템을 인수한 것이
대기업의 해외 글로벌 영화시장의 진출이요 새로운 이윤 추구인 것이다.
그런데, 대기업과 연계가 안 되는 중소기업 영화인은 사실 필름 시절부터
현 디지털 영화 시대까지 버티며 한국영화를 생산해내는 현실적 영화인이다.
이들이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 육성에서도 빠져있는 것은 한국영화 발전과 다양성 추구에도 문제가 많다.
소위 충무로 영화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해법을 구하지 못하면 한국영화 산업은 뿌리가 썩어
그 정통성의 맥락을 진실로 이어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을 이야기 했지만 아무튼 기획 제작 지원보다 앞으로는 유통 배급 방식의 고민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우리 시대에 해결해야하는 과제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우리가 선택하고 해법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의 영화적 현실을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중단 없이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글 / 손영호 (영화감독, 영화평론가)